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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2008), 두 번은 보기 힘든 영화

이탠저린 2021. 11. 1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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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홀로코스트 영화

  전 10대 중반 시절 '안네의 일기'를 책이 닳고 닳도록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더 어렸던 초등학생 시절에도 이 책을 접했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땐 이 일기가 가진 무게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머리가 큰 10대 중후반 시절, 다시 읽어본 이 일기는 단순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이 아니라, 생존 기록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아주 까마득한 옛날도 아니고, 문명화된 1930~40년대 유럽에서 한 국가가 공권력을 이용하여 특정 민족을 말살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것인가?'

 

  홀로코스트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전 꽤 많은 홀로코스트 영화를 찾아보았는데요, 그중에서도 이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란 영화는 감정적 소모가 매우 컸던 영화입니다. 정말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홀로코스트 영화 중에서도 잔인한 장면이 최대한 배제된 편인 이 영화가 그리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결말이 포함된 글입니다.

 

 

감자나 깎자고 의사를 그만두다니, 파벨 아저씨는 이상해요

의사는 그만 두고 감자 깎는 일을 하는 파벨 아저씨

브루노는 독일 베를린 출신의 남자아이입니다. 독일 나치 장교인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누나와 풍족한 생활을 하며 삽니다. 날씨는 따스하고, 친구들과 비행기 놀이를 하며 뛰어놀기 최고인 환경에서 성장하며 브루노는 행복합니다. 가끔 동네에서 행색이 남루한 사람들이 우르르 트럭을 타고 어딘가 떠나지만 그런 건 브루노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매일매일이 즐거운 브루노에겐 아름다운 것만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브루노는 아버지의 승진으로 새로운 부임지인 폴란드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도시 생활을 하다 시골에 가게 된 브루노는 매일 매일이 지겹습니다. 매일 창밖만 바라보던 브루노는 집과 먼 농장에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 그 사람들은 똑같은 파자마를 입고 일을 하는 걸까요? 그 농장에서 온 파벨 아저씨는 종종 집에 야채를 가져다주는데, 자신이 원래 의사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감자 껍질 깎는 일을 하자고 의사를 그만두다니, 브루노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새로 사귄 친구의 비밀

줄무늬 파자마의 의미

 꿈이 모험가인만큼 호기심이 많은 브루노는 결국 그 농장 쪽으로 찾아갔다가,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친구 슈무엘을 알게 됩니다. 철조망이 가운데 있어서 함께 공놀이를 하지도, 뛰어 놀지도 못하지만 브루노는 친구를 찾았다는 사실이 그저 기쁠 뿐입니다. 

 

  한편 브루노의 아버지는 교육 받을 기회가 적은 아이들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주는데, 정말이지 수업이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유대인이 얼마나 잔혹하며 파괴적인 민족인지, 왜 그들을 분리해야 하는지 알고 싶지 않은 내용만 말할 뿐입니다. 선생님은 브루노의 아버지가 독일 민족을 위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시는지 설명하는데, 누나에겐 흥미로운 수업일지 모르나 브루노는 그저 나가 놀 생각밖에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다시 밖으로 나간 브루노. 슈무엘이 사는 농장에 다시 놀러간 브루노는 슈무엘의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슈무엘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됩니다. 슈무엘은 말로만 듣던 유대인 아이였던 것입니다. 독일 국민들을 힘들게 만들었던 못된 유대인, 문화의 적인 유대인이 바로 코 앞에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우릴 그리 힘들게 하는 사람들 중 하나라고? 선생님이 분명 세계 최고의 모험가만이 착한 유대인을 간신히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단언했는데... 브루노는 혼란스럽습니다.

 

 

친구는 서로를 도와줘야지

슈무엘의 아빠를 찾기 위해 몰래 농장 안에 들어온 브루노

  친구가 유대인이란 이유로 상처를 준 브루노. 착한 슈무엘은 브루노의 늦은 사과를 흔쾌히 받아줍니다. 다시 친구가 되는가 했는데, 글쎄 집에서 이사를 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엄마의 복잡한 표정을 보니 엄마 아빠가 싸운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쉽지만 슈무엘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간 브루노는 슈무엘의 사라진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의 마음의 짐을 덜고자 친구를 돕기로 합니다. 바닥을 파서 간신히 철조망을 넘어 농장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브루노가 지금 입고 있는 이옷을 입고는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이 농장 사람들처럼 똑같은 줄무늬 파자마를 입는 건 어떨까요?

 

  농장 안(정확히는 유대인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 슈무엘의 아버지를 찾던 슈무엘과 브루노는 갑자기 농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휘말리게 됩니다. 농장 안에 있는 누군가가 갑자기 수많은 일꾼들을 어딘가로 집어 넣어 옷을 벗게 하더니, 안에 들어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아빠는 찾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휘말린 이 상황에 두 친구는 너무나 무섭고 떨리지만 서로의 손을 잡고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기다립니다. 

 

 

후유증이 매우 큰 영화

 

 이 비극적인 결말에 정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나 주인공인 브루노에게 감정 이입을 하다보니, 브루노가 들어가도 되지 않아도 될 곳에 들어가 맞게 되는 비극적 결말이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그러셨을 거라 봅니다. 하지만 슈무엘은 그곳에 있어도 될 아이였을까요? 거기 있던 그 수많은 일꾼들, 유대인 수용자들은 거기 있을 만한 사람들이었을까요? 왜 진작 슈무엘의 아픔에는 가슴 깊이 공감하지 못하고, 지금껏 편하게 살다 실수로 수용소로 들어간 브루노의 죽음엔 가슴 아파했던 걸까요? 이건 우리 나와 내 주변인들만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 것일 겁니다. 브루노를 내 아이 혹은 주변인으로 생각했기에 브루노의 죽음에만 가슴 아파 했던 것이겠죠. 

 

  어떻게 나치 독일 시기 독일 국민들이 정부가 하는 일(특정 민족 말살)에 대해 모를 수 있었느냐 비판할 수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왜 그들이 그리 무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인들이 타고나길 차갑고 무관심해서가 아닙니다. 인간 자체가 원래 본인이 지켜야 할 것들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무섭고 잔인한 것들에 대해선 더더욱 눈을 감아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금 역시도 사람들은 본인과 본인 주변의 일에만 신경쓸 뿐, 이 세상에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잔혹한 일들에 대해선 눈을 감아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때 독일 국민들이나,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의 인생을 중심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관심을 가질 일엔 관심을 갖고, 계속 깨어 있으려 노력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꼭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 비극적인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죠. 그래야만 또 다시 이런 비극적인 흑역사가 또 우리 인류에게 일어날 때 더 빨리 잘못됨을 인지하고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노력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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